다섯째 날 – 우주, 지구, 인간

지구와 인간 너머로 시야를 넓혀보자. 아주 오랜 기간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살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태양만이 아니라 밤하늘의 달과 별, 하늘에 있는 천체들 모두가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니 그럴 법도하다. 세상은 인간이 활동하는 지상의 세계를 중심으로 커다란 천구의 표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우주관은 인간이 우주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우주에 하나 밖에 없는 중심을 독차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400년 전에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한 행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00년 전에는 태양이 우리은하를 회전하는 수많은 별들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주는 수많은 은하로 가득 차 있으며 지구 위의 모든 사막과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별들이 우주에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우주의 중심은 우리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갔고, 우리는 우주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주에 대한 지식이 발달하면서, 세계관이 변하고 변화된 세계관에서 인간의 의미를 찾는 인문학적 성찰도 깊어졌다. 어렸을 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다가 성장하면서 타인도 나와 같이 소중한 존재이며, 그런 존재가 수없이 많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1968년 12월24일, 달 궤도를 돌던 아폴로 8호 윌리엄 앤더스가 촬영한 지구돋이(Earth rise)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벗어나면서 오히려 인간은 더 보편적 존재로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은하의 변방에 있는 한 행성의 거주자를 넘어 우주적 존재로 인간에 대한 관점을 확장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줄까? 그러한 생각을 해보는 것은 마치 아무런 장비 없이 우주로 여행하는 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에서 한번 쯤 이런 생각을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스친다.

현대과학을 바탕으로 지구와 인간을 우주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 우리는 인간의 키와 비슷한 길이인 미터 단위로 크기나 거리를 파악하지만, 태양계에서는 너무 불편하다. 태양계에서 길이를 재는 단위는,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인 1 천문단위(AU astronomical Unit)를 기준으로 한다. 일상의 잣대로 하면 약 1억 5천만㎞이고, 우주에서 가장 빠른 빛의 속력을 기준으로 하면 8분 20초 정도 달려야 하는 거리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태양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안다고 해서 사는데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재미는 있을 것 같다.

AU를 단위로 태양에서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식이 있다. 태양에서 번째에 있는 행성의 평균 반지름이 r = 0.4 + 0.3 X 2n  정도 된다는 티티우스-보데 법칙의 계산 값은 관측 값과 5% 이내에서 잘 맞아 떨어진다. 가령, 수성(n=-∞)은 0.4 AU, 금성(n=0)은 0.7 AU, 지구(n=1)는 1 AU, 화성(n=2)은 1.6 AU, 목성(n=4)은 5.2 AU, 토성(n=5)은 10 AU, 천왕성(n=6)은 19.6 AU로 실제 값과 거의 맞는다.

Graphical plot of the eight planets, Pluto, and Ceres versus the first ten predicted distances.

법칙이 발표되던 18세기 후반에는 아직 천왕성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 법칙으로 예측된 거리에서 실제로 천왕성이 발견되었다. 이에 고무된 사람들은 되는 2.8 AU 거리의 천체를 찾으려는 탐색에 불이 붙었으며, 화성과 목성 사이의 소행성대와 소행성 세레스를 발견하는 성과를 냈다. 그런데 다음 행성인 해왕성과의 계산 값은 관측 값과 22% 정도 오차가 난다. 이 법칙은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는 뉴턴의 역학체계에서 유도되는 법칙이 아니라 태양계의 진화과정에서 우연히 성립한 규칙이 아닐까 생각되고 있다. 이 법칙을 외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등식에 4, 3, 2의 숫자가 순차적으로 나타나며, 에 1을 대입하면 우리가 사는 지구의 1 AU가 나온다.

지구로부터 더 멀어져보자. 1977년에 발사한 보이저 1호와 2호는 각자의 방향으로 2019년 기준으로 약 200억㎞ 떨어진 태양계 외곽으로 날아가고 있다. 인간이 만든 우주선이 그렇게까지 멀리 가고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의 작은 우주선에서 보내는 미약한 신호를 잡아서 해석할 수 있는 현대의 과학기술도 놀랍다. 알다시피 신호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여 작아지니 말이다. 태양계의 크기는 반경 1광년(약 6.3만 AU) 정도이며, 반경이 5만 광년 크기인 우리은하는 태양계와 같은 별을 수천 억 개 거느리고 있다.

태양은 우리은하의 중심에서 2.6만 광년 떨어진 변방에서 2.4억 년을 주기로 공전하고 있다. 46억 살의 지구는 벌써 우리은하를 20회 정도 공전한 셈이다.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은하가 우주 전체라고 생각되었다. 수천 억 개의 별들로 둘러싸인 우리은하를 넘어서 희미하게 빛나는 다른 천체들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의 과학자들은 130억 년의 시공간을 날아온 은하까지도 관측할 수 있다. 확장된 관측능력과 이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우리은하와 같은 은하들이 또한 수천억 개 있을 정도로 인간의 우주 관념도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이전에 말했듯이 우주에는 태양처럼 빛나는 별들이 지구의 모든 모래알의 개수와 비슷하거나 더 많다. 그렇게 많은 별들 중 하나, 그 빛나는 별의 세 번째 행성에 우리가 살고 있다. 방대한 우주에는 특별히 어디가 중심이라고 할 것이 없이 어느 곳이나 다른 곳과 비슷하다. 즉, 우주에는 중심이라고 특정할만한 위치는 아예 없다. 거시적 규모에서 볼 때 어느 방향으로나 어느 위치이거나 동등하다고 여겨진다. 이것을 우주원리라고 부르는데,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특별한 곳에 있지는 않으나 우주의 어느 곳과 동등한 곳에 있는 편재되지 않은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간적으로 이렇게 방대한 곳에서 있지만, 인간은 아주 적은 영역에서 아웅다웅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시간의 척도에서는 어떨까? 우주의 탄생과 진화를 다루는 학문을 우주론(cosmology)이라고 하는데, 현대과학의 이론과 현대기술의 관측은 빅뱅(bigbang) 우주론을 표준으로 인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하고 있는 우주의 탄생에 대한 시점은 138억 년 전이다. 138억 년 전에 헤아릴 수 없이 뜨겁게 밀집한 작은 영역이 팽창을 거듭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태초의 순간을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아주 짧은 시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우주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빅뱅우주론으로 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도 나오고, 이 책과 같은 시리즈의 3권 ‘전진’편에 필자가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지구는 우주 나이의 3분의 1정도나 되는, 적지 않은 나이의 천체다. 개인은 공간적으로 우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지만, 시간적으로 볼 때 개인의 인생은 우주 나이의 1억 배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왜소한 존재이면서도 인생은 짧지 않다. 우주의 나이를 하루 24시간으로 볼 때, 인간이 출현한 시각은 밤 11시 59분 25초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필자는 그런 관점보다도 우리 인생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의 나이에 비해서도 그렇게 무시할 만하지 않다는 관점을 더 좋아한다. 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나이로 보면, 10만 배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다고 생각해도 나쁘지 않다. 인간이 얼마나 더 미래에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주와 더불어서 살아가는 동안에 이러한 비율의 격차는 더욱 작아질 것이고 공간적으로도 더 넓은 곳으로 확장하며 격차를 줄여갈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미래를 넘어, 지구의 미래를 넘어, 우주의 미래를 이야기해도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가 된 것 같다. 지구가 언제 외계 천체의 공격을 받아 없어질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그런 정도의 충돌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지구의 나이만큼 시간이 지나면, 태양이 연료를 소진하고 희미한 백색왜성으로 바뀌면서 최후를 맞이할 가능성이 더 크다.

일생의 절반을 살고 있는 현재의 태양은 말년에 지구를 삼킬 정도로 몇 백 배 팽창하다가 결국 지구 크기로 줄어들며 빛이 꺼질 것이다. 90억년 동안 진행된 태양계는 주인공의 퇴장과 함께 연극이 끝나게 된다. 연극이 끝나갈 쯤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가 만나는 충돌과정을 겪게 되는데, 태양계에 무슨 일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시나리오가 나온다고 해도 인간이 태양계에 남아있다면, 파국을 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너무도 먼 훗날에 벌어질 일이라 인간이 얼마나 진화하고 과학기술이 얼마나 발전하여 그러한 우주적 변화에 대처할 수 있을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앞으로의 발전을 지금 예측하기는 어렵다. 먼 후대 인류는 현재의 지구적 영향력을 넘어, 태양계적 영향력 그리고 은하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하지만 역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기는 하다.

이러한 의견은 상상일 뿐이며. 과학적 근거에 의한 것은 아니다. 내친 김에 은하적인 미래를 넘어 더 큰 규모, 즉 ‘우주적 미래를 현대과학에서는 어떻게 예언하고 있을까‘도 알아보자. 우주의 운명까지 점치기에 인간의 과학 기술은 아직 부족하다.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은 현재 팽창하고 있는 우주가 더 빨리 팽창하며 모든 물질들이 산산이 분해되어 우주 어느 곳이라도 진공과 비슷한, 거의 완벽한 공(空)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우주의 임계밀도에 대해 과학자들과 현재까지의 관측적 증거로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주의 임계밀도 값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서, 우주는 팽창을 멈추고 다시 수축하여 빅뱅의 순간처럼 모든 것이 밀집되어 진공과 반대되는 상태로 갈 수도 있다. 또는 빅뱅과 팽창이 반복되고 있는 우주의 어느 한 순간에 우리가 있다고 누군가 주장해도 누구도 반증하기 어렵다. 아예 우리가 사는 우주와 다른 우주들이 평행하게 수없이 많다고 이야기해도 역시 반박하기 어렵다. 현재 인간의 과학으로는 우주의 운명까지 논하기는 힘들고, 태양계와 우리은하의 운명 정도는 꽤 신빙성 있게 예언할 수는 있다.

갈 수 있는 만큼, 우주의 끝과 우주의 미래를 가 보았으니 다시 지구로 돌아와서 하늘을 바라보자. 하늘의 모든 천체, 태양, 달, 별, 행성은 지구의 자전으로 일어나는 일주운동으로 24시간에 360도 회전한다. 그러니까 자전축 근처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1시간에 15도씩 회전하거나, 북극성에서 멀리 떨어진 별들은 회전반경이 커서 동쪽에서 나타났다가 서쪽으로 사라질 것이다. 오랫동안 밤하늘을 쳐다보면 별들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과거 언젠가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에 의하여 낱낱의 별들 중에서 밝은 것을 이어서 형태를 만들기도 했다. 주변의 밝은 별들을 이으면, 여러 형태의 기하학적 모양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보는 인간은 친숙한 형상으로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별자리들은 밤하늘에서 새로운 이야기 거리가 되었고, 신화가 되었으며 개인과 국가의 미래를 예측하는 점성술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점성술을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참 어색하다. 눈으로 볼 때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우리의 시선 방향으로는 앞 뒤의 거리를 판별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에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들은 보는 것처럼 실제 거리가 가깝지 않고 멀다. 실제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물리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는 별개의 천체들을 한 별자리로 묶은 것일 뿐이다. 별자리에 어떤 심오한 뜻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우리의 감성적 혹은 문화적 관념에는 과학의 실제와 다른 것들이 적지 않게 있다고 생각한다.

태양은 뜨겁고 양(陽)의 기운을 나타내며 달은 차갑고 음(陰)의 기운을 나타내기 때문에, 음의 기운이 최고에 이르는 보름달 밤에는 온갖 악령이나 귀신, 도깨비, 흡혈귀가 출몰하니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세계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달은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가 아니고 단지 태양빛을 반사하는 것이라, 달빛과 태양빛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래의 그림은 그러한 과학적 사실을 통하여, 흡혈귀를 퇴치하는 이야기다. 재미로 보면 그만인 이 그림은 과학이 어떻게 미신과 부조리를 넘어서 세상을 변화시켰는지를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과학은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일 뿐이다. 과학의 분야는 굳이 자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실체에 더 가까이 가고 오류를 덜어내는 방법이자 태도로써, 과학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 등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올바른 지식은 이러한 과학적 과정을 거친 것이며, 알아두면 유용한 것들도 많다. 그런데 살면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학적 태도로 사람이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성장과정과 경험으로 형성된 개인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우리는 사회라는 생태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사회 생태계가 요구하는 상상의 질서와 믿음, 가치에 순응하기 쉽다. 시간이나 지역을 벗어나면 달라질 특정 사회의 특정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여유조차도 잊어버리고, 상대적인 가치 체계에 순응하는 인간이 되어버리곤 한다. 과학은 편재된 관념과 삶에 대하여, 보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태도가 성장을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순간 내가 갖고 있는 갈등과 누군가에 대한 감정은 다른 관점에서 볼 때는 어떨까? 자기 정체성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요동적인 관점과 잠시 거리를 두어 보자는 뜻이기도 하다. 사고가 아니라 관찰만 객관적으로 잘 해도, 인식이 달라지고 작은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개인의 수준에서도 어쩔 수 없는 과거의 흔적이 자신의 미래를 잘못 인도하지 않도록 주관적인 믿음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자.

그리고 우리세대보다 다음세대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과학적 태도로 집단지성을 키워나가야 한다. 단지 지구를 지키기 위한 생태계적 노력 외에도 사회적 편견과 부조리를 바로 잡을 수 있도록 말이다.

 

참고도서

  • 2017, 김경렬 외. 지구인도 모르는 지구. 반니.
  • 2014, 헤이즌, M. 로버트. 김미선 번역. 뿌리와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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