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passport)에 대해서는 함께 하는 글에서 잘 소개되었으니 과학과 관련되어 살펴보도록 하자. 여권은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보안이 극히 중요하다. 보안이 허술하여 자기 신분을 도용당한다거나, 꼭 걸러야 할 범죄자가 국경의 망을 빠져나간다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클 것이다. 여권이라는 물리적 대상에 숨은 여러 물리적, 화학적 특성 외에 보안을 중심으로 과학의 관점에서 가볍게 바라보자.
긴급 여권과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나라 여권은 보안이 중요한 지폐와 마찬가지로 조폐공사에서 만든다. 물론 지폐의 위조를 방지하기 위하여 쓰이는 여러 기술들이 여권에도 구현되어 있다. 가령 재질에서부터 돋보기로나 보일 미세문자,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이는 잉크로 인쇄된 부분, 빛을 비쳐보아야 나타나는 워터마크인 은화, 미세한 굴곡에 새겨져 있어서 복사해도 재현하지 못하고 각도가 맞아야만 보이는 글자 그리고 빛을 비추면 현란하게 나타나는 홀로그램과 같은 보안적 장치들은 지폐에 사용된 기술 그대로다. 그리고 지폐와 달리 여러 장으로 구성되는 여권에는 특별하게 서명란이 있는 장부터 맨 뒷장까지 개인의 여권번호가 천공되어 있는데, 레이저로 구멍 크기가 뒷장으로 갈수록 작아지도록 구멍을 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아마 일반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보안기술이 적용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지폐와 달리 여권은 신분증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소지자의 정보를 인쇄 형태 외에 전자 칩에 암호화하여 수록한 전자여권이 2008년 8월 25일부터 발급되기 시작했다. 여권에 사용된 보안관련 기술과 과학은 크게 봐서, 소지자와 무관하게 지폐에 사용된 부분과 소지자의 신분을 위변조 하지 못하게 개인 정보를 담은 영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홀로그램이나 은화 등과 같이 지폐에 사용된 보안 기술은 빛을 비추거나 보는 각도를 달리하면 나타나게 하는 광학적 기법이다. 통상적으로 동물이 인지할 수 있는 시각세포에 대응되는 가시광선(可視光線 visible light)은 파장이 원자보다 겨우 몇 천 배일 정도로 짧다. 파장이 짧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미세한 차이에 따라서 다양하게 간섭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 마치 비 오는 날 휘발유나 기름의 얇은 막에 나타나는 여러 색의 현란한 무늬를 기술적으로 처리하여 원하는 방식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통용되는 전자여권은 지폐에 사용된 이러한 위변조 방지 기술 외에 IT 기술을 이용한 전자 칩이 내장되어 있다. 물론 칩 안에는 개인의 사진과 신분관련 정보 외에 지문 정보와 같은 생체 정보도 담겨있다고 한다. 여권에 노출된 사진을 기술적으로 잘 교체하여 위조 여권을 만드는 장면은 여러 영화에서 나온다. 그러나 전자 여권의 칩에는 여러 정보가 훨씬 더 안전하게 암호화되어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여권에 보이는 사진과 칩에 저장된 사진을 비교할 수 있다. 전자 여권의 신뢰도가 더 높은 것은 당연하다.
여권의 전자 칩은 제일 뒷장의 수원성 이미지 옆 녹색의 영역 부근에 내장되어 있다. 녹색의 숲 영역 역시 미세한 굴곡을 내는 요판 잠상으로써 비스듬히 보면 KOREA글자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전자 여권에는 배터리가 없는데 어떻게 칩이 동작하는 것일까? 이것은 발전기를 만들어 우리에게 전기 문명을 선사한 패러데이의 전자기 유도 법칙으로 동작하는 것이다. 전자 칩을 감싸며 얇은 안테나 역시 뒷면을 두르며 내장되어 있다. 판독기의 전류가 시시때때로 변하면, 변화하는 전류의 영향으로 전자여권의 회로에는 유도전류가 발생하며 전자 칩을 구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교통카드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교통카드에 들어간 것과 유사한 칩과 안테나가 전자 여권에 들어가 있어서, 여권 판독기에 접촉하지 않고 가까이 대는 것만으로도 판독기는 칩을 동작시켜서 암호화된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전자 여권은 우리가 늘 사용하는 지폐와 교통카드의 기술을 보다 더 안전하게 담고 있을 뿐이며 특별히 다른 방식의 기술은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여권을 사용할 일은 대폭 줄어들었지만, 여권을 사용할 때 일어나는 기술적인 과정을 우리는 일상에서 늘 가까이 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