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전자의 이중주(QED)

빛(light)이라고 쓰기만 해도 밝아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빛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세상을 드러내 줍니다. 빛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지만, 여러분들이 빛이 없는 세상 가령, 모든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 여러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빛은 존재합니다. 우리 시각이 느낄 수 있는 빛의 범위는 너무나 좁지만, 시각을 벗어나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빛은 모든 물체에게서 나오고 흡수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단지, 인간의 시각에서 사라졌을 뿐 우주 역사에서 항상, 우주 어느 곳에서도 빛은 존재해왔죠. 단지 우주가 막 생겨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러니까… 우주에서 가장 빠른 빛이 원자보다도 원자핵보다도 더 짧은 거리를 지나는 시간 정도의 찰나를 빼 놓고 빛은 우주와 더불어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전자(electron), 전기시대와 전자제품으로 대변하는 현대문명의 주역인 전자는 물질을 이루는 결합과 물질이 변화하는 반응, 아니 물질의 기초가 되는 원자를 대변하는 대리인으로써 자연의 온갖 현상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생명체의 에너지를 만드는 세포호흡의 전자 전달계에서 지구 대부분의 물질과 결합하고 있는 강렬한 반응성의 산소, 입자동물원과 동물원 밖의 입자들까지도 붕괴하며 안착하는 최종입자로써, 전자는 자연의 온갖 존재와 변화의 주연 배우입니다. 전자가 없는 물질과 전자가 없는 현상의 예를 찾기는 너무 힘든 일입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초록빛 잎 등 대부분의 자연현상은 빛과 전자의 거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일에 빛과 전자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빛과 전자,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아는 것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일이죠. 양자역학의 역사와 발전에 큰 힘을 보탰던 솔베이 회의, 솔베이 회의에서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1927년의 5차 솔베이 회의 주제 역시 “전자와 광자(Electrons and Photons)”였습니다. 그러나 이 다섯 번째 솔베이 회의의 주인공은 전자와 빛이 아니라 아인쉬타인과 보어였습니다. 당시 막 태어나서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는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문제로 둘 사이에 역사적 논쟁이 오고 갔던 것이죠. 물론 둘 사이의 논쟁에는 언제나 빛과 전자가 등장하여 둘의 대화를 채우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강조하기 위하여 먼저 말했듯이 자연을 이야기할 때 빛과 전자는 빠뜨리기 힘든 일입니다. 새로운 역학체계인 양자역학도 빛과 전자를 잘 이해하고자 하는 온갖 노력과 방정식들로 가득한 것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죠. 그러나 아직 양자역학은 빛과 전자를 잘 담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호평을 받고 있는 쉬뢰딩어 방정식도 상대론적이지 않았으며, 양자역학의 중요한 특성인 스핀과 배타원리 자체를 양자역학 안에서 설명할 수도 없었으니 설익은 양자역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로 논쟁한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예 유망주 역학체계가 그 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미시현상들을 계산해내고 화학의 기초를 세워가고 있는데,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도 없었겠죠.

1927년에 열린 5차 솔베이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들. 참석자 29명 중에서 17명이 노벨상을 수상한다. 독특한 외모로 아인쉬타인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유일한 여자로 퀴리 부인도 보이고, 내성적인 디랙이 가운데 있다.

이렇게 난처한 상황을 상당부분 해결한 사람은 바로 디랙(Paul Dirac 1902~1984)입니다. 앞에서 디랙 방정식으로 전자의 스핀과 반전자를 자연스럽게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손으로 안겨준, 양자론과 상대론의 불화 혹은 어색함을 해결한 디랙. 그는 1928년 디랙 방정식을 발표하기 전 해인, 중요한 솔베이 회의가 열린 1927년에 양자 전기동역학(QED quantum electrodynamics)라는 용어를 등장시킨 기념비적인 논문을 발표합니다. 논문 제목은 “복사의 방출과 흡수에 대한 양자이론 (The Quantum Theory of the Emission and Absorption of Radiation)” 제목만 봐서는 뭐가 기념비적인 것인지 알 수 없겠죠? 여기서 복사는 빛을 말합니다. 보통 빛 자체보다는 물질(정확하게는 전자)과 상호작용하며 나오는 빛이라는 의미를 담고자 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원자에서 방출하는 빛 혹은 흡수되는 빛을 말한다고 여길 수 있어요. 복사(radiation)를 원자에서 나오는 빛(light from atom)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이제 논문과 관련하여 설명하도록 할게요. 플랑크와 아인쉬타인을 통하여 빛은 에너지가 양자화되는 것까지 다루어졌으나 고전적 전자기 이론인 맥스웰 방정식 테두리를 많이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맥스웰 방정식의 해로써 빛을 고전적인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으로 보거나 입자(광자 photon)로 보기는 했지만, 고전적 전자기장을 양자화하여 양자화된 장(quantized field)로 다루지는 못했죠. 빛을 양자화하여 고전적인 場(classical field)가 아니라 양자장(quantum field)으로 만들 수 있는 수학적 방법을 디랙이 논문에서 처음 제시했습니다. 장을 취급하는 두 가지 방식(고전적, 양자적)이 이름은 그럴싸하게 다르지만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지 파악하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니 흘려서 들어도 좋습니다.

1927년 2월 2일에 발표된 최초의 양자장론(QFT) 논문에서, 디랙은 QED 용어를 만들었다.

디랙의 1927년 논문으로 돌아가면, 디랙은 전자기장을 양자화함으로써 빛과 전자의 상호작용을 제대로 계산하고 이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으로 현상적으로 중요합니다. 이전까지 양자역학으로도 전자가 빛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여 흡수하거나 방출하여 선 스펙트럼을 내는지 설명하지 못했었습니다. 아인쉬타인이 1917년에 레이저(laser)의 원리, 양자광학(quantum optics)을 개척하는 는 했지만 궤도 혹은 양자상태에 있는 전자와 전자가 방출하고 흡수하는 빛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기술한 것은 아닙니다. 디랙은 빛을 양자장으로 만들어서 이러한 상호작용이 전개되는 프로세스를 기술하고 계산할 수 있게 했습니다. “원자 안에서 가만히 잘 있던 전자가 왜 갑자기 자발적으로 빛을 내뿜으며 자신의 상태를 변화시키는가? 원자 안의 전자가 특정 빛을 흡수하면 어떻게 에너지가 더 높은 상태로 변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양자화된 빛은 바닥상태에서도 양의 에너지를 갖고 진동하는데, 이러한 양자요동은 불확정성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전자는 빛의 본질적 요동과 상호작용하면서, 자발적으로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있다.”는 대답을 수학적으로 전개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전자기장(빛)을 양자화하면, 빛은 바닥상태에서도 양의 에너지를 갖고 진동하며 전자와 상호작용 한다.

 

기존의 양자역학에서는 빛이 없는 경우에 들뜬 상태(excited state)와 가장 에너지가 낮은 바닥 상태(ground state)는 다른 에너지를 갖는 별개의 상태로써 완벽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두 상태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들뜬 상태에서 바닥상태로 가는 현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즉 양자역학만으로는 빛의 자발적인 방출(spontaneous emission)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양자역학이 전자에 대해서만 양자화하였고, 빛에 대한 시각을 고전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빛도 전자와 함께 양자적으로 취급되어야만, 빛과 전자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양자역학에서 분리되었던 두 상태 사이에 통로가 열리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중요한 물리적 개념에 대해서는 영어적 표현도 같이 쓰는 것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영어 표현도 같이 나타내는 경우에는 그것이 꽤 중요한 용어나 표현이라고 강조하기 위해서 라는 것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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