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의 빨간 약과 파란 약

 

영화 매트릭스가 나왔을 때, 그 내용과 전개에 흠뻑 빠져들어 재미있게 보았지만, 가장 인상 깊게 내게 남은 것은 모피어스가 네오를 처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모피어스는 파란 약과 빨간 약을 양쪽 손에 들고 말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된다고. 진실을 보지 못하고 거짓의 세계에서 평범한 일상이 계속 된다고. 빨간 약을 먹으면…
인공지능(AI)이 극도로 발달한 미래 세계에서 인간은 몸이 움직이는 현실이 아닌 캡슐에 갇혀서 양육되고 있지만, 감각을 느끼고 정신이 펼쳐지는 뇌를 장악한 AI가 주는 세상의 작동 방식에 따라서 살며 가공된 세계에 갇혀있다. AI는 인간이 감각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공급하며 제어하고 있지만, 인간은 자기의 자유의지가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간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미 AI는 사람들에게 신과 똑같은 역할을 하며 인간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AI에 쫓겨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곤궁하게 실제 현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부의 사람들이 허구 세계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이 실제 세상을 깨달을 수 있게 하려고 하지만 힘들다. 미국 영화답게 영웅인 네오가 등장하여 허구 세계의 지배자와 대적하며 사람들을 진짜 세상으로 구출하고자 한다. AI가 만들고 조작하여 작동하는 가상의 허구 세계의 작동방식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현실을 자각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판단을 하고 현실의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하는 본래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가령 인공지능이 작동시키는 가상의 세계와 다른, 사랑과 희생 그리고 헌신과 같은 일이 가능한 진실의 세계.


이따금씩 과연 우리가 현실이라고 자각하는 세상은 물리적으로는 맞겠지만, 과연 정신적인 면에서 인공지능이 구축하고 운영하는 가상의 세계와 다를 것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정의와 정의의 기준, 가치와 가치의 기준, 믿음 자체의 근거와 믿음들 간의 충돌. 의례 현실은 그렇게 상대적이고 복잡하며 다양한 것이라고 치부할 것을 넘어서, 제각각의 정의와 믿음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혼란스러워지고 국가 간의 분쟁과 개인의 갈등은 심화될 것이지만, 그것이 사회가 감내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코비드-19 바이러스가 창궐하며 바이러스의 작동 기제와 감염 경로가 객관적으로 증빙되고 있는 현대의 과학기술 시대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음모론에 빠지고 잘못된 신앙관에 기대어 본인을 넘어 지역 사회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며 지켜야 할 방역 수칙들을 무시하며 버젓이 잘못된 신념으로 사회를 위험하게 한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반복하여 사용했던 ‘상상적 믿음’이라는 표현은 잔향을 준다. 시대와 지역 그리고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사회적 가치와 감정적 감각, 정의와 믿음은 어찌 보면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와 퍽 닮았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선호, 불완전한 논리와 부족한 근거로 선택하는 정의와 가치는 자신도 모르게 사회문화적 특성에서 경험하며 형성된 상상적 믿음의 결과일 뿐일 수 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뿐이지만, 누구나 비슷하게 개인의 취향과 편재된 상대적인 사회문화의 특성을 더 절대적이고 가치 있고 정의로운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정신적인 진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일부의 사람들이 인간의 삶에서 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실을 찾기 위한 일들을 해왔으며, 현대 문명의 상당 부분은 그러한 사람들 덕분이다. 특히 과학에서의 그러한 진보가 새로운 세상을 열고 경작해왔지만, 과학의 영역 밖의 어느 곳에서도 주관적 편향과 이익을 넘어 객관적 사실과 가치를 추구했던 이들에 의하여 인간의 사회는 더 맑아졌고 건강해질 수 있었다. 늘 우리는 파란 약에 취해서 접하고 있는 현실에서 더 많은 보상을 받으려고 애쓰지만, 결국 남는 것은 우주에서 하나 뿐인 정체성을 가진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다수의 인생들이 그렇게 가상의 세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공통성이 아닌가 싶다. 빨간 약을 택할 용기와 현실적 어려움은, 마치 이승 대신에 저승을 선택하는 것처럼 두렵고 불안할 수도 있지만, 가끔씩 용량을 줄여서라도 빨간 약을 먹고 보다 보편적인 가치와 자신의 의견보다 현명한 집단지성을 존중하며, 상대적이고 왜곡된 세상의 기준에서 약간 비껴서 있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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