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과학과 삶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다시 과학을 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학창시절에 과학수업을 통해 만났던 이미지가 뿌리 깊다. 과학적 지식을 많이 접하다 보면, 내가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다. 저명한 강사나 저자가 풀어내는 과학 이야기는 졸업할 때 갖고 나온 이미지와 다르게 자극시키고, 진리와 조화의 세계에 다가서는 느낌을 준다. 그러한 느낌들은 정말로 소중한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에는 좋은 강좌도 많고 좋은 책들도 많이 나왔으며, 자신이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자료와 동영상도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필자의 경험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가급적 과학강연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과학적 소양과 지식을 향유하는데 좋을 것 같다. 필자도 좋은(거의 대부분의 강연은 다 좋을 것이다) 과학강연을 접하면서 많이 배우고 생각하게 된다. 아는 것을 왜 듣느냐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실제로 강연에 참석하여 들어보면 같은 지식을 바라보는 다른 접근과 취급을 느낄 때도 있고, 과학교육에서 일방적 교육이 아니라 쌍방적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곤 한다.

카오스 재단에서 매년 봄 가을로 열리는 두 차례의 정기 강연은 추천할 만하다. 카오스 재단의 강연을 들으면, 강연자 외에 준비한 사람들의 노고까지도 느껴지면서 더욱 감명을 받을 때가 많다. 물론 독서를 빼 놓을 수도 없고, 혼자 읽는 독서 외에도 독서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좋다. 과학은 보편적인 것을 탐구하는 것인데, 혼자의 세계에서는 주관적 관점의 오류와 편향적 관점에 빠질 수도 있다. 다른 사람과 토론을 하면서 스스로도 정리되고 관점을 객관적으로 다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책 이상의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과학이 그렇게 발달했듯이, 과학을 이해하고 더 알고자 하는 방식도 과학이 취한 과정과 닮을 필요가 있다.

 

교양과학을 접하는 여러분들에게 덧붙이고 싶은 것은, 과학자에 대한 우상을 갖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똑똑하다거나 천재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 분야에 한정된 것이며 그것도 과학자의 연구분야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며 그 영역을 넘으면 여러분들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대과학의 심오한 내용들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자연의 비밀을 심오하게 깨달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램일 뿐이다. 그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자연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 진리를 통한 삶에의 통찰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통찰은 연구와 별개로 과학자 개인의 질문과 사유에 의한 것이며, 과학자의 통찰과 관점도 보편적이지 않고 주관적인 것일 수 있다.

또한 과학자라고 해서 비슷한 분야의 지식들을 다 잘 알고 있지도 못하고, 그렇게 아는 것을 똑똑하다고 부를 수도 없다.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어떤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학교 시험을 잘 보는 것처럼 답을 맞춰야 똑똑하고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인의 경우 교양과학을 접하는 사람들은 신성한 진리의 울림을 접하고 싶다는, 어찌 보면 과학보다는 종교적인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과학지식의 근거를 넘어서는 곳까지 무리하게 확장하며 남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 역시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질문과 토론을 통해서 검증 받고 스스로 검증을 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교 다닐 때처럼 많은 지식들이 시험을 위해 대기할 필요는 없다. 그 지식을 음미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경험과 잘 사용할 수 있는 정확한 이해, 사고전개를 합리적으로 할 수 있는 훈련, 그러니까 공교육에서 목표로 걸었던 태도가 중요하다. 여러분들이 접하는 과학적 성취들은 당대의 뛰어난 과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들여서 찾아낸 것이고, 그 성취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어느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함의하고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화되지 않은 지식들은 이롭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되거나 편향된 시각을 강화시킬 수도 있다.

 

과학자들은 일반인보다 과학적 역량이 뛰어나고 잘 알고 있겠지만, 과학은 자연현상과 원리를 보다 더 근본적으로 보다 더 자연스러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발달해왔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려고 노력했고, 그 설명이 어떠한 가정이나 기초에 의지하는 것을 싫어하며 더 이상 부자연스럽거나 설명하기 힘든 토대 위에서 설명이 제한 받는 것을 꺼려 했다. 여러분들이 과학 책을 읽거나 강연을 들으며 해야 할 것은, 과학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옷이나 액세서리가 나를 치장하는 것처럼 과학지식으로 나의 사회적 외양을 치장하는 것도 괜찮지만, 교양과학에 시간을 들여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발견과 깨달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낯선 곳을 여행하며 발견하고 느끼고 맛보는 즐거움처럼, 과학적 관점으로 일상을 여행하며 발견하고 깨닫고 찾아가는 즐거움은 우리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아닐까 싶다.

 

자연-과학-인간, 과학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교량으로써 자연의 풍부한 산물과 가르침을 인간에게 전달해왔다. 인간은 과학을 통하여 비로서 자연의 피조물 이상의 지적 생명체가 되었고, 현대인이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깊이와 넓이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과학이 발전하며 인간의 앎이 넓어질수록 인간의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서 선택 받은 존재가 아니라 이 광대한 우주에서 얼마나 평범한 곳에 있으며 다른 생물체들과 같은 분자로 구성된 보편적 존재 중의 평범한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지상의 속박을 벗어나 인간을 우주적 존재로 만들며, 우리 삶의 기준과 방향을 다시 쳐다보게 한다.

‘아주 작은 공간에서 아주 짧은 시간만 유지할 수 있는 우리 삶의 가치와 목표, 생각과 활동이 과학이 태동하기 전의 인간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과 ‘결국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현재, 현실, 현생이기 때문에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만 어루만지고 간다 한들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의 생각의 진동을 느낄 이도 있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과학이 밝혀준 우리 존재의 모습을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현대과학의 옷을 입었지만 정작 그 안의 우리는 원시인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 같다. 단지 인간의 생태계가 자연에서 사회로 변했을 뿐, 먹이와 잠자리, 본능과 권력을 쫓는 삶과 양태는 거의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원시인 같은 현대인.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며 성취한 문명과 자연에 대한 이해와 달리,

인간 스스로를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는 원시인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과학적 태도와 방법이 원시사회를 현대의 문명세계로 변화시켰고,

不可知 했던 자연현상들의 의미를 초월자의 뜻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상당부분 끌어왔지만,

정작 그 자신과 인간, 인간의 생태계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방법은 얼마나 원시적인가? 과학적 태도와 방법이 삶에 때때로 중요하지 않을까?

함부로 남용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태도를 견지한다면, 객관적 관찰과 합리적 이해라는 과학의 방법을 우리 일상으로 더 많이, 더 깊이 들여도 좋지 않을까?”

 

성인이 되어 교양과학을 접하는 이유는 과학적 지식을 많이 앎으로써 유사과학에 속지 않거나 과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하는 즐거움, 과학을 매개로 소통함으로써 여러 사람들과 유익한 경험을 함께 나누는 것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쫓기지 않으면서, 바쁜 시간에 구태여 과학을 다시 접하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나와 내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는 일이 아닐까 싶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 자신의 굽어진 지점 혹은 미숙한 정신영역을 보면, 그곳에 과학적이지 못한 암흑과 미혹의 어스름함이 깔려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미숙한 영역은 오랫동안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영역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영역, 즉 과학적 태도를 잃은 상태로 접하는 영역일 수 있다. 단지 내 안의 그러한 영역만이 아니라 내가 잘 관계를 갖지 못하고 있는 가까운 이들과의 문제상황 혹은 관성적 태도를 보아도,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편향으로 마음 놓침 상태가 반복되는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비슷한 방식으로 더욱 확장되어 우리사회에서도 편향적이고 선동적인, 그리고 확신 편향적 정보를 바탕으로 한 자기 선택의 정당화 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우리는 늘 이렇게 과학적일 수도 없고 과학적일 필요도 없으며, 그러한 강박은 오히려 해롭다. 우리 인간은 600만년 전 침팬지와 갈라져 나온 후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살도록 진화되지 않았다. 호모 사피엔스 시절부터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20만년에서 겨우 몇 백 년 정도만 과학을 경험하며 지낼 수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과학이 그 짧은 시간에 놀라운 성과를 인간에게 주었던 것에 우리는 겸허할 필요가 있다. 과학적 지식과 더불어 과학적 태도와 과학의 속성은 우리의 삶과 사회가 선택하고 발달해야 할 방향에 대하여 유익한 방법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다. 필요한 경우에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누구에게나 어렵지만, 어느 자신의 한 영역 혹은 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라도 과학적 태도를 가져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며, 나중에 더 유익한 경험과 방법을 경험하게 되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의 결과와 더불어 과학의 과정을 우리가 조금 더 진하게 맛볼 수 있다면, 개인의 내면에, 개인의 일상에, 사회의 발달에 있어서 필요한 경우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한 선택은 개인이나 사회의 자존감을 높여줄 것이다. 이 책은 마지막까지 이렇게 두서 없는 이야기로 끝맺게 되는 것 같다. 다른 기회에 다양한 모습으로 독자와 만나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그리고 우리 삶이 싱그럽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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