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

과학에서 slow에서 연관되는 단어는 두 가지였다. 화학 반응에서 반응물이 생성물로 가는 과정에는 통상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반응이 느리게 진행되는 단계가 전체 화학 반응의 속도를 결정한다는 것이 그 하나이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반응에서 전체 시간은 가장 느린 단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반응이 빠른 단계에서 반응이 더 빨라도 전체 반응시간에 미치는 영향은 작지만, 시간이 많이 소요된 느린 단계의 반응 속도를 줄이는 것은 전체 반응의 시간을 줄이는데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하나 slow에서 연상된 개념은 관성(inertia)인데, 이것은 inertia의 어원이 ‘게으르다, 쉬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iners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관성은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그러니까 운동의 변화에 대하여 저항하는 혹은 변화에 대하여 게으른) 속성을 말하는데, 자연이 운동하는 원리를 서술하는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의 세 가지 운동법칙 중에서도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다. 뉴턴의 운동 제1법칙을 ‘관성의 법칙’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관성의 개념을 구체화한 것은 뉴턴이 태어난 해에 죽었던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에 의해서다.

갈릴레오 이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가 2천 년 전에 이야기한 것이 거의 그대로 사람들 마음에 남아 있었고 어찌 보면 일상적 경험과 어울렸다. 경험으로는 운동하는 물체는 점점 속력이 줄어들어 결국 정지한다. 물체가 운동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그 물체에 힘이 작용해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운동하는 물체의 속력이 줄어들어서 정지하는 것은 물체가 닿는 표면이나 공기 저항의 마찰력을 받아서 정지하는 것이지 아무런 힘도 받지 않는데 속력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물체가 어떤 면에서 운동하느냐에 따라서 물체에 운동을 방행하는 마찰력의 크기가 달라서 정지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달라지고, 물체가 공기 중에서 운동할 때와 물에서 운동할 때 역시 받는 저항력의 크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정지할 때까지의 속력 변화도 다르다. 오히려 이러한 마찰이 없다면 물체는 아무런 힘도 받지 않고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며, 이것이 관성이다. 관성은 단지 빠르기만이 아니라 방향을 포함한다. 같은 빠르기를 유지하지만 운동의 방향이 바뀌는 것도 운동 상태가 바뀌는 것이며, 돌을 매달아서 일정한 속력으로 돌리는 경우에 줄이 당기는 힘 때문에 방향이 바뀌는 원운동이 가능한 것이며 줄이 돌을 잡아당기는 장력이 없다면 돌은 처음에는 직선으로 날라가다 중력의 영향을 받아서 포물선 운동을 하며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관성은 운동을 유지하려는 성질로 빠르기와 방향을 유지하려는 성질이므로 일정한 속력으로 직선 운동하려는 성질로 볼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에 지동설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을 때 주된 반대 의견 중의 하나가 관성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면, 위로 높이 던진 물체가 내려오는 동안 지구가 움직였으므로 물체는 똑바로 떨어질 수 없을 텐데 현실에서는 똑바로 떨어지지 않는가”하는 반론은, 지구 위에서 지구와 같이 운동하던 물체가 높이 올라갔다고 해도 지구와 같은 운동을 유지하려는 관성을 갖고 있어서 지구가 움직인 만큼 움직여서 똑바로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그러한 관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반론에 대하여 능히 반박할 수 있을 정도로 관성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또한 실험을 통하여 관성을 확인했기 때문에 지동설을 지지하는데 거리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고 말할 정도로 자연에 내재한 수학적 속성을 중시한 갈릴레오에게, 현상적 이해보다는 더 단순한 가정으로 더 정확하게 행성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 체계로 마음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공전하기 때문에 운동의 방향이 바뀌고 공전하는 도중에 태양과의 거리가 변하며 공전하는 속력도 변하고 있다. 마치 줄에 매달린 돌이 줄이 잡아당기는 장력 때문에 원운동 할 수 있는 것처럼, 지구도 태양이 지구를 잡아당기는 만유인력 때문에 타원 궤도로 공전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지구가 일정한 빠르기로 직선 운동하는 것처럼 운동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지구가 공전하는 궤도가 거의 원에 가까운 타원으로써 속력의 변화가 작기 때문에 그 차이를 몸의 감각이 느끼지 못하고 지상의 물체들도 그 이상의 마찰력으로 서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향의 변화에 대해서 둔감한 것 역시 공전 궤도 자체가 워낙 크기 때문에 반경 1억 5천만 km로 365일에 걸치는 미미한 방향의 변화도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지구 공전과 계절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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