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개인과 사회, 문명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는 당연한 현실은, 과학과 관련한 논쟁들을 관심 있게 만든다. 우리는 여기서 과학자들이 이룬 과학적 성취보다는, 과학의 정체성과 관련된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러분들이 책(반니 출판사)[1]이나 인터넷으로 어렵지 않게 “과학은 논쟁이다” 토론을 볼 수 있고, 볼만한 가치가 있기에 하나를 선택하여 같이 생각해보기로 했다.
다음의 주장에 대해서는 상대 토론자가 있으나, 필자는 상대 토론자의 생각에 메이지 않고 필자 나름의 생각으로 서술할 것이다. 여러분들도 각자의 근거와 생각으로 다음의 주장들에 대하여 토론하고, 다른 사람들의 주장도 들어보면 어떨까?
필자가 서술하는 내용은 주장한 이의 반론을 듣지 않고 필자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하여 주제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성급하다. 아마도 필자의 생각에 허점이 있을 것이고, 주장한 이의 반박을 받는다면 여러분들은 다른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2]
논쟁) 자연법칙은 인간이 만든 것인가?
자연법칙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인간이 만든 것인가? 하는 상이한 관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자연법칙은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이다.” 라는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자.
명제 ① “자연법칙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근거 1) ‘자연의 법칙’이라는 개념은 특정한 시기(16~17세기)에 특정한 지역(유럽)의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했다. 입법자로써 신이라는 개념이 확대되고 군주제가 확립되던 사회적 영향으로, ‘자연에도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 라는 관념이 나왔다. 왜 법칙이 자연에 있느냐? 신이 부여했기 때문에 법칙이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며,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신을 찬미하는 일로 생각되기도 했었다.
자연원리를 법칙이라 부르는 것은 확실히 사회적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보인다. 사람이 지켜야 할 사회적인 법(law)과 유사한 것이 있어서 복잡한 자연이 조화로울 것이라는 생각은, 자연에게도 law(법칙으로 번역)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도록 만든 것 같다. 그런데 자연원리를 law로 표상하는 것은 당시 인간의 관점이고 한동안의 유행이었을 뿐, 현대에서는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법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근거 1)은 자연의 원리를 법 혹은 법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 것이다. 자연법칙을 신이 부여했다는 당시의 생각 역시 그 시대의 관점이지, 현재의 우리가 따라야 할 관점은 아니다. 명제 ①을 주장하는 것이, 단지 그 시대의 관점을 지금까지도 답습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명제 ①에 사용된 ‘자연의 법칙’이라는 표현은 좀 애매하다. 자연의 법칙을 ‘자연의 원리’로 해석하면, 당연히 인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므로 명제 ①이 부정된다. ‘과학이론’으로 해석하면, “과학이론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가 되어, 트리비얼 하게 명제 ①은 참이다. 토론을 지켜보면, 상대 토론자는 자연의 법칙을 자연의 원리로 해석하고 있는데 반해, 주장하는 이는 과학이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 보인다. 논의를 가치 있고, 명확히 하기 위하여 명제 ①을 토론자들이 다르게 해석하지 않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다. 두 토론자가 같은 명제에 대하여 각자의 주장과 논리를 펴야만 논쟁이 의미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같은 문장이지만, 각자가 다른 명제로 해석하여 논쟁하는 것은 출발이 잘못된 것이다.
명제 ①을 다음과 같이 변경할 것인데, 토론자들이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마음으로나마 토론자들께 양해를 구한다.
명제 ①’ “과학이론은 자연의 원리를 표상하지 못한다.”
이렇게 명제를 바꾸어 놓고 보니, 토론의 열기가 식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원래 토론의 주제인 ‘물리법칙은 자연에 존재하는가, 인간이 만든 것인가?’에 비하여 싱겁기는 하다. 일단 잠정적으로라도 명제 ①을 명제 ①’로 설정하고 토론을 지켜보도록 하자.
근거 2) 갈릴레오의 관성에 대한 사고실험, ‘질량에 상관 없이 동시에 떨어진다’ 라는 현실과 다른 주장, 실제로 정확하게 3:1로 나타나지 않는 멘델의 법칙 등 과학자들이 법칙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복잡한 자연에서 인간이 추상적이고 이상화된 요소를 뽑아내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한 것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위에서 서술한, 과학의 본질적 한계성들 중에서 ‘환경의 한계성’과 연관 있다. 완전히 이상적인 환경에서 관찰하는 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이상적인 조건에서 관찰할 수 없다고 해서, 관찰의 가치를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관찰에서 환경의 한계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관찰결과를 설명하는 이론이 한계가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고 나온 것이라면 의미 있다. 갈릴레오도 현실에서는 무거운 것이 더 먼저 떨어진다는 것을 물론 알았다. 공기의 저항 때문에 현실에서는 낙하속도가 다르지만, 진공이라면 물체의 무게와 종류에 상관 없이 똑같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갈릴레오 시대에 현실에서 보이기 어려웠던 질량에 무관한 동시낙하 운동은, 현대의 실험실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갈릴레오의 이론이 충분한 정도로 참이라는 것을 검증할 수 있게 한다. 측정 오차와 관찰한계 때문에 완벽한 결과가 아니라는 주장은 무리한 것이며, 과학의 본질을 거스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근거 3) 옴의 법칙, 보일의 법칙, 케플러의 법칙들과 같이 제한을 두고 조건을 잘 만든 다음에 관찰해서 나온 것이므로, 자연법칙은 사람이 만든 것이다. 진공에서는 갈릴레오의 자유낙하 주장이 옳겠지만, 진공은 실제의 자연이 아니며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공간으로 자연을 재정의한 것이다. 현실의 화성 궤도는 완벽한 타원이 아니며, 타원궤도를 설명한 뉴턴의 중력법칙도 부정되고 일반 상대성이론으로 발전되었다. 과학의 법칙은 새로운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탐구하며, 새로운 형태의 규칙성이나 수학적 조화 등을 만들어 내는 창의적 활동이다.
근거 2)와 근거 3)에서 ‘자연의 법칙’을 ‘과학이론’으로 해석하는 듯한 주장자의 관점이 더 드러난다. 과학이론은 당연히 사람이 만든 것이며, 시간이 지나며 과학이론의 한계성이 조금씩 극복될 때마다 개선된 혹은 패러다임이 변할 정도의 이론이 나올 수 있다. 과학은 검증할 수 없는 절대진리가 아니라, 검증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참인 이론이다. 검증 한계 내에서 관찰로 뒷받침 되는 주장은 인간이 임의적으로 혹은 주관적으로 가공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속성을 반영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학에서는 본질적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검증에 의해, 인정되거나 수정, 폐기되는 일이 계속 될 것이다.
근거4) 정말 자연의 법칙이 존재했다면 왜 케플러 이전에 다른 천문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했을까? 케플러가 복잡한 자연현상에서 이상화하고 추상화한 여러 조건들을 다지고 데이터들을 그것에 맞춰서 만든 것이다. 19세기말 윌리엄 톰슨이 물리학이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 것이 완전히 바뀌었듯이 현대 물리학에서도 그럴 수 있다. 과학이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과학 지식의 여러 층위와 단절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케플러가 발견한 행성운동의 세 가지 법칙들은 지난한 것이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관측 천문학자라고도 불릴 수 있는 튀코 브라헤와 당대의 뛰어난 수학자 케플러의 만남이었기에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 법칙은 케플러의 고군분투로도, 5년을 고생하며 얻은 제 1, 2 법칙보다 10년이나 더 걸려서 찾아낸 것이다. 그 이전까지 그리고 그 당시에 어느 팀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자연을 이해하고 기술하는 관점이 고전 물리학에서 현대 물리학으로 넘어오며 본질적으로 바뀐 것 같이, 미래의 물리학이 현대 물리학의 체계를 철저히 부정할 수도 있다. 그러한 개연성은 열려 있고,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인간의 문명, 자연에 대한 인식, 인간 스스로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할 것이다. 인간 집단으로써는 위기가 아니라 발전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대 물리학의 가치가 평가절하 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과학이 관찰하고 관찰할 수 있는 영역,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고 세밀하다. 이러한 관찰결과들의 많은 것을 원칙적으로, 충분한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이론이 도래한다고 하더라도, 무참하게 망하는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 생각은 과학적이지 않고 개인적인 사견이다.
미래 물리학에서 성공적인 양자중력이론이 나오고, 미래 수학이 리만 가설을 증명하고, 미래의 뇌과학이 인간의 커넥톰까지도 완벽하게 지도화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은 늘 인간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둘 것 같다.
[1] 책은 http://asq.kr/dlvh 에서 볼 수 있다.
[2] 이 글을 쓴 후 필자는 두 논쟁자에게 본문의 내용을 메일로 보냈고 답변을 받았지만, 사적인 메일로 주고받은 내용이라 공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 논쟁자 모두 필자의 글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 찬성했다는 것은 밝힌다.